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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전분6등법과 공법: 세금과 토지의 관계

📑 목차

    1. 조선의 건국과 토지제도의 재정비

     

    고려 말기, 권문세족이 토지를 독점하면서 국가 재정이 붕괴되고 농민이 몰락했다. 이성계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 건국(1392년) 직후 토지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 핵심이 바로 과전법(科田法) 이다.


    과전법은 고려의 전시과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사유화된 토지를 국유화하여 다시 관리에게 분급하는 제도였다. 토지의 소유권은 철저히 국가에 귀속되며, 관료는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경작민에게 빌려주고 수조권만 행사할 수 있었다.

     

    이 제도의 가장 큰 의의는 국가 중심의 공전(公田) 체계 복원에 있었다. 토지를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관리의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귀족층의 사적 토지 축적을 억제했다. 즉,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토지를 ‘공공 자산’으로 인식하고, 세금 체계를 통해 이를 관리한 국가였다.

     

     

     

    조선시대의 전분6등법 토지

     

     

     

    2. 토지 측량과 생산성 평가의 기준 – 전분6등법의 도입

     

    조선의 토지세 제도는 정밀한 측량과 등급화를 통해 세율을 정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국가의 안정된 재정을 위해 전국의 토지를 다시 측량하고, 그 비옥도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하는 전분6등법(田分六等法) 을 시행했다. 전분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 적용했다.

     

    등급                          토지의 성격                                                        1결당 생산량 기준(대략)           세율 비율
    상상전 가장 비옥한 토지 1결당 30두 최고 세율
    상전 매우 비옥한 토지 약 26두 약간 낮음
    중상전 중상급 비옥토 약 22두 중간 수준
    중전 평균적 토지 약 18두 기본세율
    하전 척박한 토지 약 12두 감세 대상
    하하전 극도로 척박한 토지 8두 이하 최저 세율

     

    이 제도는 단순한 세금 정책이 아니라, 토지 가치 평가와 세금의 과학적 기준을 마련한 제도적 혁신이었다.

     

    이는 현대 부동산 세제에서 ‘공시지가’나 ‘과세표준’을 구분하는 개념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은 이 제도를 통해 농민의 부담을 완화하고, 국가 재정의 안정성을 확보하며, 공정한 조세 원칙을 확립하려 했다.

     

     

     

    3. 공법(貢法)의 시행과 세금제도의 혁신

     

    세종(世宗) 대에 들어 조선의 세금제도는 한 단계 더 발전한다. 세종은 전분6등법을 기반으로 하되, 각 지역의 실제 생산량과 기후, 농민의 형편을 고려한 ‘공법(貢法)’ 을 도입했다.

     

    공법은 기존의 일률적 세율 제도를 개선하여,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탄력적으로 조정했다. 즉, 농사가 잘된 해에는 세율을 조금 높이고, 흉년에는 낮추는 제도였다.

     

    세종은 이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10년 넘게 시범 운영을 실시하고, 각 지방의 의견을 수렴했다. 결국 1444년(세종 26년) 전국적으로 공법이 시행되었다.

     

    이 제도의 핵심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토지의 비옥도(전분6등법) + 연간 생산량(공법)을 결합한 이중 기준 세율 체계

    2) 세금 납부를 쌀(조세) 중심으로 단순화하여 행정 효율화

    3) 농민의 부담 경감을 통한 생산의 안정화

     

    공법은 조선 조세 행정의 근간이 되었고, 농민에게는 ‘예측 가능한 세금 제도’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선진적인 조세 시스템으로 평가된다.

     

     

     

    4. 전분6등법과 공법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

     

    전분6등법과 공법의 도입은 단순한 세금 개혁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의 관계를 재정의한 제도적 전환점이었다.

     

    첫째, 농민의 세 부담이 안정화되었다.

    조선 이전까지 농민은 귀족이나 사원(寺院)의 사적 착취에 시달렸지만, 조선은 세율을 명확히 규정하고 국가가 직접 징수함으로써 착취를 제도적으로 차단했다.

     

    둘째, 국가 재정이 예측 가능해졌다.
    전분6등법으로 토지 가치가 정량화되면서 조선 정부는 연간 세입을 계산하고, 군사·치안·건설 등에 예산을 배분할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재정 계획 행정(budget planning) 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셋째, 지방 행정의 통제력 강화.
    조세가 중앙집권적 방식으로 관리되면서 지방 권력의 자율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조선이 500년간 안정적인 행정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5. 세종 이후의 변화와 한계

     

    공법이 시행된 후에도 세금 제도는 끊임없이 수정되었다. 특히 연산군 이후 정치 혼란과 기후 악화로 수확량이 줄자 농민의 세금 부담이 다시 증가했다.

     

    명종 대에는 직전법 폐지(1556년) 로 인해 관료의 토지 분급 제도가 붕괴되었고, 국가 재정의 일부가 지방에서 자율적으로 조달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전세 수취의 불균형이 커졌고, 부유한 지주층이 세 부담을 회피하면서 농민에게 세금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세종의 공법이 설계한 ‘공정한 세금 원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6. 토지세 제도의 사상적 기반 – ‘민본(民本)과 공공성’ 

     

    조선의 조세 철학에는 유교적 민본사상(民本思想) 이 깊게 깔려 있었다. 즉, 백성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부강하다는 원칙이다. 세종과 정도전은 모두 토지를 “하늘이 백성에게 내린 공공의 자산”으로 보았다.

     

    따라서 국가는 토지를 관리하고, 백성은 이를 경작하여 공평하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하늘의 도(天道)’ 에 합치한다고 여겼다. 이 철학은 오늘날의 공공 토지 관리 개념, 즉 “토지는 개인의 소유이지만,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다”는 원리의 정신적 뿌리라 할 수 있다.

     

     

           

    7. 공법 이후의 개혁 시도와 근대적 토지제도로의 이행

     

    17세기 이후, 조선의 세금 구조는 점차 복잡해졌고, 지역 간 세율 격차가 커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대동법(大同法) 이다.

     

    광해군 때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통일해 납부하는 제도였다. 이는 공납 부담의 불공정을 바로잡은 조치로, 공법의 정신을 계승한 세제 개혁이었다.

     

    18세기 영조는 균역법(均役法) 을 도입하여 군역(군사 의무)을 대신해 세금을 내도록 했고, 백성의 부담을 한층 더 완화시켰다. 이러한 개혁들은 모두 공법의 정신 – 공정한 세금과 공공의 재산 관리 를 근대화된 형태로 이어가는 과정이었다.

     

     

     

    8. 결론 – 조선 토지세 제도의 의의와 현대적 교훈

     

    전분6등법과 공법은 조선의 경제 시스템을 넘어, 한국 사회의 토지관(土地觀)조세 정의(租稅正義) 를 형성한 제도적 유산이었다.

     

    이 제도들은 1)국가가 토지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평가하고, 2)공정한 기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며, 3)농민의 생존권을 보호하려 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조세철학과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부동산 세제의 핵심인 ‘공시지가제’, ‘누진세율’, ‘조세 형평성 원칙’ 등은 조선의 전분6등법과 공법에서 이미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세금 제도는 단순히 과거의 행정 기술이 아니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며, 세금은 정의의 실현 수단” 이라는 철학적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