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1. 삼국시대의 토지제도와 왕권의 기반
삼국시대의 토지제도는 국가 권력 구조의 초석이자, 당시 농업 중심 사회의 경제 질서를 형성한 핵심 제도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농업 생산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토지의 분배 방식이 곧 정치 권력의 분배를 의미했다.
고구려의 경우, 왕이 귀족들에게 식읍(食邑) 을 하사했다. 식읍이란 일정 지역의 조세와 노동력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뜻했으며, 실제 토지 소유권보다는 ‘세금 징수권’을 의미했다.
즉, 귀족은 국가의 허락 아래 백성의 생산물 일부를 거두었고, 이 권리를 통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했다. 왕은 식읍을 부여하거나 박탈함으로써 귀족을 통제했고, 이를 통해 중앙집권적 구조를 강화했다.
백제 또한 유사한 봉토제(封土制) 를 운영했다. 왕이 신하에게 봉지를 내리고, 그 지역의 세금과 인력을 관리하게 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봉지의 궁극적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왕에게 있었으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 언제든 회수될 수 있었다.
신라는 상대등을 중심으로 한 귀족 체제가 강했지만, 진흥왕 대 이후에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토지를 귀족에게 분급하던 제도를 점차 제한하고, 국가의 토지 직할화가 추진되었다. 이는 후대에 통일신라의 관료전 제도로 발전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 통일신라의 토지제도 개혁과 관료전의 탄생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성덕왕(722년) 은 기존의 녹읍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형태의 토지 분급 제도인 관료전제(官僚田制) 를 실시했다.
녹읍제는 관료에게 특정 지역을 부여해 그 지역의 세금과 공물을 직접 거두게 하는 제도였지만, 지방 통제 약화와 귀족의 사적 지배를 초래했다. 이에 비해 관료전은 관등과 직위에 따라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국가가 분급하고, 수확의 일부만을 관료의 녹봉으로 인정했다.
즉, 토지의 소유권은 철저히 국가에 귀속되었으며, 관료는 단지 일정 기간 그 수익을 ‘이용’할 뿐이었다. 이 제도는 신라가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지방 호족 세력이 성장하고,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관료전은 점차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9세기 후반에는 사전(私田) 이 다시 확산되었고, 국가의 조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3. 후삼국시대의 토지 혼란과 호족 세력의 대두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는 토지제도의 붕괴기였다. 국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의 호족들이 무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토지를 불법 점유하기 시작했다. 호족들은 농민을 직접 지배하며 자신들의 사병을 양성했고, 조세를 중앙에 바치지 않고 사적으로 축적했다.
결국 전국 곳곳에서 사유지가 확산되었고,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유랑민이 되어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이 시기의 토지제도는 사실상 ‘국가 소유’에서 ‘호족 소유’로의 전환기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새로운 통일 왕조인 고려가 등장한다.
4. 고려 초의 토지개혁과 전시과 제도의 확립
918년 건국한 고려는 신라 말기의 토지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국가 중심의 토지 질서 재편을 추진했다. 태조 왕건은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라 하며 사유지를 억제하고 국가 소유 원칙을 회복하려 했다. 이후 성종(成宗) 대에 전시과(田柴科) 제도가 완성되었다.
전시과는 관리의 품계와 공로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로,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에, 수조권은 관리에게 주어졌다.
전시과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토지 소유권은 국가에 귀속된다.
- 수조권만 관료에게 일시적으로 부여된다.
- 직위가 사라지면 토지는 반납해야 한다.
이 제도는 국가가 관료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고려 전기 중앙집권 체제의 기둥이었다.
5. 전시과의 개정과 귀족 세력의 강화
전시과는 고려 전기부터 후기까지 세 차례 개정되었다.
- 시정전시과(976년) – 문무백관 및 군인에게 차등 지급
- 개정전시과(998년) – 문벌 귀족의 특권 강화
- 경정전시과(1076년) – 문무관료 전체에 대한 토지 재분배
초기에는 공정성을 유지했지만, 점차 문벌귀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유화 경향이 심화되었다. 특히 문종 이후에는 공음전(公蔭田) 제도가 등장해 고위 귀족 가문이 대대로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공음전은 사실상 귀족의 세습 토지로, 국가의 토지 통제 체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들은 다시 귀족의 토지를 경작하며 세금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6.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과 토지제도의 붕괴
13세기 이후, 고려는 원(元)의 간섭을 받으며 중앙의 권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서 권문세족이라 불린 고위 귀족층이
불법적으로 토지를 점유했다. 이들은 겸병(兼幷) 즉, 인근 농민의 토지를 강제로 합병하거나 ‘장리(長利)’라는 명목으로 고리대금을 통해농민의 토지를 빼앗았다.
이로 인해 전국의 토지 대부분이 소수 귀족 가문에 집중되었고, 국가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이에 공민왕은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을 설치하여 불법 사유지를 환수하고 농민을 해방시키려 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개혁은 부분적 성과에 그쳤다. 결국 고려 후기의 토지제도는 국가의 공전(公田) 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시기로 평가된다. 이는 조선이 등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배경이었다.
7. 농민층의 변화와 사회 구조적 영향
토지제도의 변화는 단순히 재정 문제를 넘어, 백성의 삶과 사회 신분 구조를 결정짓는 요인이었다.
삼국시대의 농민은 국유 토지를 경작하며 세금을 내는 존재였지만, 통일신라 후기에 들어 귀족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전 농민으로 전락했다. 고려 전기에는 전시과를 통해 일정 안정성을 확보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귀족의 사적 지배가 강화되면서 농민은 소작료와 부역에 시달리는 반자유 농민층으로 변화했다.
이는 향후 조선시대의 신분제 형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즉, 토지 소유 구조가 곧 신분 질서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한 것이다.
8. 결론 – 토지제도를 통해 본 권력의 흐름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토지제도 변화는 단순한 경제 제도의 발전사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의 확립 → 붕괴 → 재정비라는 역사적 순환의 기록이다.
삼국시대의 식읍제는 귀족 통제의 수단으로, 통일신라의 관료전은 국가 중심의 합리적 체제로, 고려의 전시과는 관료제 유지의 핵심 제도로 기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귀족층이 토지를 세습하면서 국가의 공공성이 훼손되고,결국 새로운 개혁의 필요성이 등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조선의 과전법, 균전제, 공법 등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토지와 재산에 대한 공공성 의식의 뿌리가 되었다.
즉, 부동산의 문제는 단지 ‘경제’가 아니라 ‘권력과 사회 정의’의 문제임을 이미 천년 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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